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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서론...................................................................................................2
Q1. 키취는 과연 나쁜예술인가?........................................................2
Q2. 그렇다면 [나쁜예술]인 키취를 구별해내는 방법은 무엇인가?....................2
Q3. 기술이 부족한 그림이 키취가 되는가?...............................................3
Q4. 상투적인 그림이 키취가 되는가? ......................................................3
Q5. 왜 키취적 미술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는가? .....................................4
Q6. 재현적인 예술에만 키취가 존재하는가? .......................................... 4
Q7. 키취의 유용성은 무엇인가?................................................................4
결론............................................................................................................5
서 론 키취란 미적 가치의 측면에서 훌륭하고 진정한 예술품과는 대조되는 하찮고, 천박하고, 저속한 미완성품의 의미를 가지며, 윤리적 측면에서는 모조, 위조, 거짓말 등의 특성을, 산업적으로는 대량생산된 싸구려 상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원래 이 말은 뮌헨의 화상에 의해 '하찮은 예술'을 가리키는 속어였다. 그런데 이렇게 어원적 정의로는 관통할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가 키취에는 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키취는 보다 다원화된 의미에서 대중문화의 전반을 관통하는 미학적 범주가 되었다. 또한 키취가 포괄하는 개념은 다른 어떠한 문화적 개념보다 포괄적이다. 따라서 키취에 대한 난해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질문을 통해 살펴보려한다. 교재를 중심으로 살피되, 이 과정에서 부득이 주관적 개념이 개입할 수도 있음을 밝히는 바다.
Q1. 키취는 과연 나쁜예술인가? 우선 반대의 질문을 던져보자. 예술제도권에서 인정받는 화가, 혹은 여러분이 그린 그림은 [착한그림]인가? 흔히 [나쁜예술]로 불리는 키취는 의미그대로 부정정, 혹은 비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비평에 있어서 키취를 [나쁜예술]의 관점으로 판단하는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윤리적 범주와 미적범주를 혼동한 부적절인 판단인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저급예술, 나쁜 예술로서의 키취는 고급예술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고급예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반대쪽의 개념이 있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키취라 부르는 것일 뿐 그 절대적 존재의미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중심의 상실이라는 현대미술의 다원화 경향으로 살펴본다면 키취는 단순히 다원화된 예술의 한 장르일 뿐이지, 그 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예술양식에 주관적 선호성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좋고, 나쁨 이라는 우열적 질서를 부여하는것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을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키취는 [나쁜예술]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나쁜‘이라는 말은 미적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윤리학적 의미에서 사용된 어휘이다. 키취는 타락된 예술이며 이 타락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예술을 진리나 도덕성과 연관시켜 파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미학을 윤리학이나 존재론과 분리된 독자적 영역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키취는 사회적 문화적 코드와 예술을 맞물린 혼성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재에서는 키취의 이중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키취는 [나쁜예술]이 맞는 것 같다.
Q2. 그렇다면 [나쁜예술]인 키취를 구별해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일단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9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유행한 찢어진 청바지는 키취패션을 대표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대학생을 가엾게 여긴 하숙집 할머니가 빨래를 마친 후 정성스레 청바지를 꿰매준 사건이 발생한다. 동일한 청바지를 놓고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파악하게 된다. 과연 찢어진 청바지는 부도덕한 것일까? 이것은 미학에서 심적거리(Psychical distance)라고 불리는 개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미적판단에 있어서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좋은예술]은 사물의 실제적 측면과 그에 대한 실제적 태도를 제거해 버리는 부정적인 억제적 국면과 더불어, 긍정적 국면을 창출하는 경험의 구성이다. 이렇게 예술을 대하는 입장에서 자아와 예술적 세계의 통제적 거리를 [심적거리]라 할 수 있다. 벌로프에 의하면 거리란 개인이 거리를 취할 수 있는 힘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이며, 대상의 특성에 따라서도 변할 수 있는 것 이라고 말했다. 어떤 예술작품이 성적인 욕구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으로서 실패한 것이며, 이것은 반드시 예술가의 잘못일 필요는 없다. 예술가가 설정한 거리의 한계와 대중이 설정한 거리의 한계가 서로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오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 자신에게는 훌륭한 대상이었지만, 대중에게는 ‘부도덕한 외설’로 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리를 결핍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대부분을 키취적 작품으로 간주하려는 벌로프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이와 같은 심적 거리라는 개념은 키취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엄밀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예로 예술로 향유되지 않았던 교회 예술의 다양한 반응들의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다른 예로 모두 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일종의 문화적 합일 상태를 이룬 캠퍼스에서 찢어진 청바지는 조금도 부도덕 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즉 하숙집 할머니와의 심적거리에도 불구하고 키치가 아니라는 말이된다. 오히려 그들은 더 자연스레 찢기 위해서 커터나 사포를 동원하는 등 보다 높은 예술적 성취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키취의 구별은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많으며, 명쾌한 기준으로 나누어 내는 것은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Q3. 기술이 부족한 그림이 키취가 되는가? 기술이 부족하다고 해서 키취가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 비하하는 그림들을 상기해 볼 때 기술적으로 부족한 그림이 키취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키취란 부적절한 기술과는 무관한 것이다. 물론 기술적 측면에서 열등한 키취도 많이 있긴 하지만 , 기술적으로 우수한 키취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대한 예술과 위대한 키취는 명백히 구분하기가 어려울만큼 서로 밀접한 경우가 종종 있다.
Q4. 상투적인 그림이 키취가 되는가? 키취적 그림이라 하면 연상되는 몇가지 이미지가 있다. 젓을 먹이고 있는 어미돼지와 아기돼지, 폭포와 물레방아, 버스기사 옆창에 매달린 기도하는 소녀 등등... 어디선가 한번 이상씩은 봤음직한 상투적인 이미지가 쉽게 연상된다. 과연 이렇게 상투적인 형식주의적 복제품들은 모두 키취가 되는걸까? <올랭피아>라는 작품은 벌거벗은 창녀의 나체를 화면가득 채워 그림으로서 비평가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을 보면 오히려 창녀 <올랭피아>보다 더 성적인 환타지를 제공하는 음탕한 자세와 만져보고 싶은 오묘한 충동까지 갖고 있다. 이 비너스는 더 음탕하면서도 이를 보상 하려는 듯한 어떤 정화를 일으키고 있다. 카바넬은 매우 상투적인 표현방법들을 동원하여 도덕적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나체의 섹시한 모델에게는 비너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파도와 수평구도, 그리고 하늘에는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을 그려넣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은 심적거리를 축소시킴으로서 작품과의 진정한 만남을 방해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와 같은 그림을 볼때 우리는 실제로는 그림에서 아무것도 만나지 않게 된다. 결국 어떤 분위기만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가 바로 키취가 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즉, 키취에게 그림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림은 단순히 어떤 기분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자극일 뿐이다. 따라서 상투적인 속성을 내재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키치라 할 수 있다. 대량복제, 생산을 통해 상투적 이미지를 창조하든, 혹은 기존 상투적 이미지를 차용하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키치의 속성에 해당된다.
Q5. 왜 키취적 미술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는가? 키취는 어떤 분위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자극이다. 즉 키취는 단순히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기회로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따라서 상투적인 대상에 대한 생각들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키취는 이처럼 순수한 정서가 귀해지고, 욕구는 잠들어 인위적인 자극이 필요하게 될 때 요구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모든 시대에 전위가 있듯이 후위도 있기 마련이다. 전위미술이 발생하게 되는 대칭점으로서 후위미술이 발생하게 된다. 순수fine이라는 용어는 미, 기술, 우수성, 우아, 완전성, 실제적이거나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순수미술은 기계적인, 응용적이거나 실용적인 미술과는 대조되는 특별한 성격을 얻게 되었다. 순수미술이란 원래 그 예술적 가치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 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가치는 없고, 장식적, 상업적, 소유적, 과시적, 축적적 가치만 남게되는 것을 '쓰레기'라는 의미의 '키치'라고 부른다. 이처럼 키치는 전위의 등장 혹은 예술의 존재와 동시에 그 반대의 의미로서 발생요구가 나타나는 것이다.
Q6. 재현적인 예술에만 키취가 존재하는가? 아니다. 추상 회화에도 키취의 속성은 존재한다. 상투적인 이미지는 앞서 말한대로 작품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 해주는,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켜주는 거리가 결핍되어 있다. 이것은 추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추상화 역시 나름대로의 상투적 표현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추상적 키취 역시 존재 하는 것이다. 교양있어 보이거나, 고귀함을 더하기위해 가정이나 사무실을 장식해주고 있는 추상회화 역시 그 목적만으로도 충분히 키취가 된다. 부동산 투기로 부자가 된 졸부의 거실에 꽂혀있는 영문판 브래태니커가 키치적 비웃음을 주듯이 말이다. 이처럼 키취는 대상이 아니라 개념이기 때문에 구상이든 추상이든 개념의 적용에는 전혀 차이가 없게 된다.
Q7. 키취의 유용성은 무엇인가? 키취는 이렇듯 부정적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대중적인 유용함을 많이 확인하게 된다. 감상적인 설득 방식으로서의 센티멘탈리티에서 출발하여 갖가지 이국 취향, 골동품 취향, 속물적 댄디즘, 사이비 예술주의 등 키취적인 양식과 메커니즘은 너무나 방대하다. 진실과 거짓의 관계가 더욱 모호해지는 시점에서 키취는 도리어 어떤 건강함을 지닐 수도 있다. 사이비 진정성이 판치는 키취의 자기기만은 사이비 진정성보다 훨씬 나은 것이요, 자기반성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앞에서 예로 든 이발소 그림들은 매우 촌스럽고 조악하지만 나름대로 푸근한 느낌과 향수를 준다. 키취의 유용함은 이런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결 론 여기까지 키취에 대해 알아보았다. 질문을 통해 살펴보았지만 키취에 대한 난해함은 더 커진 듯 하다. 단순히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던가 상투적이라고 키취인 것은 아니고 키취는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정의 할 수도 없다. 따라서 키취를 정확히 정의하고 이해할 수는 없으나 과거뿐만 아니라 현 시대에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존재해야할 것이고 존재할 것이 확실하므로 그것을 예술의 한 범위로 인정해야한다.
참 고 문 헌
1)K. 해리스 저/ 오병남 외 역/ 현대미술-그 철학적 의미/ 서광사/ 2001/ 서울 2)채희석/ 키취미술 비판/ 2000 3)아브라함 몰르 저/ 엄광현 역/ 키치란 무엇인가/ 시각과 언어/ 1996/ 서울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