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한그림 | 미술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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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미술요약

한그림쌤 2010.12.09 06:24 조회 수 : 3011

 

 

1. 여는 말

미술은 사회의 반영이다.

예를들어 18세기 후반 영정조 시대의 정치경제적 안정으로 인한 문예에 대한 관심은 곧 조선회화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어 낸 것이라 할수 있으며,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 사대부들의 패권주의가 만들어낸 획일적인 사고방식들은 조선말기의 회화가 반영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근대미술을 언급하기전에 우선 근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 인가를 우선 다루어야 한다. 먼저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근대의 기점은 조선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고 실학사상이 대두되었던 18세기 후반을 보는 입장과, 갑오경장을 전후한 시기, 혹은 일제식민시대를 진정한 근대의 기점으로 보고있다.

미술의 경우는 개화기를 통해 서양미술을 유학한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이 귀국하여 활동하던 191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일제식민시대 동안의 미술을 근대미술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이 일반적이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도 무척 수난의 시대로서 문화뿐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개항 및 식민 등등,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갖게된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은 근대 한국화단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근대미술의 시작배경을 살펴본 후에 그 특징을 조명하고,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몇몇 미술단체를 살펴봄으로써 근대 우리미술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2. 근대미술의 시작

19세기 조선말기 미술의 흐름을 보면 전통회화의 방향을 남종문인화 풍으로 바꿔놓은 김정희와 그의 영향을 받은 조희룡, 전기, 김수철, 허련 등과 장승업 및 지역의 무명작가들이 주로 활동 하였다. 그런 가운데 개항과 더불어 신문물이 유입되어졌는데, 이는 급속한 사회구조의 재편을 초래하였다. 미술에서도 역시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읽을수 있는데 사진의 유입으로 인하여 그동안 각종 의례용 회화나 어진(御眞) 제작을 독점적으로 도맡아온 도화서(圖畵署)가 폐지된 점을 예를 들수 있겠다.

도화서의 폐지는 그동안 도화서가 가지고 있던 조선 미술계의 지배력의 폐기를 암시하는 것이였으며, 또한 앞으로 겪게될 미술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변화가 미술 내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신문물 유입에 따른 반작용일 뿐이였다. 조선말기의 미술은 그렇게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보수성에 안주한 채 근대미술에게 미술사의 페이지를 넘겨주게 된다.

개항과 함께 밀려 들어온 신문화는 서구식 그림에 눈뜨게 해주었다. 서양인들은 직접 조선에 들어와 서구식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조선에 근대식 미술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게 되었다. 또한 앞서 개항한 일본을 통하여 서양화의 유입이 확대되면서 조선미술계의 재편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독자적 근대국가를 설립하려던 고종의 시도는 제국주의에 의해 좌절되고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으로 민족적 주체성을 상실한체 식민통치에 의한 일본화풍 및 서구미술이 유입되면서 우리의 근대미술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3. 근대미술의 특징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일제식민이라는 뼈아픈 고통의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시대적 상황속에서 우리나라의 미술이 정상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당시의 미술은 마치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듯이 왜곡되고 굴절된 암담한 전개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조라고 하는 예술의 발전적 원칙에서 벗어나 오히려 무기력한 전통에의 답습과 맹종에 빠져있었고 이는 우리미술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인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불구하고 우리의 근대미술은 몇가지 긍정적인 특징들을 갖게된다.

우선 학교적 미술교육의 시작을 예를 들 수 있다. 이전 까지의 화가는 화원이나 개인에게서 문하생의 자격으로 그림을 배우는 것이 고작이였으나, 개항이후 새로운 근대적 미술교육학교가 등장함에 따라 소질을 갖춘 지망생들의 등단을 가능케 한점을 들수있다.

또한 서양화 및 일본화의 유입은 김정희를 시초로 조선말기화단을 주름잡았던 남종화풍의 답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을 접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으로도 볼수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그림이 반드시 산수화나 인물화등의 전통적 회화일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다양성을 띄게된다. 이런 교육으로 나타난 화가들이 20세기 화단을 이끌게 되는데, 허백련,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 최우석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일본으로의 유학을 통해 현대적 미술교육을 받고 돌아온 고희동, 김관호 등이 활동함으로써 한국현대화의 기틀이 차츰 전개되었다.

서양화풍의 유입역시 한국화의 화풍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재료와 기법의 변화에에 대해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화풍의 변화와 소재의 변화등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은 민족적 특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화풍으로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정리하자면, 근대미술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근대 미술비평의 등장과 활발한 미술단체의 결성에 따른 새로운 미술관의 수용과 실험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중섭, 구본웅 등의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작가의 등장은 아카데미즘의 답습에 머물러 있던 미술계에 활력을 불러넣는 계기가 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에 의해 추상회화가 시도되기도 했다.

 

4. 서화협회

1918년, 우리의 미술이 방황하던 그런 상황속에서 민족주의 미술운동인 서화협회가 창설되었다. 한국최초의 민간미술단체인 서화협회는 침체된 민족문화의 서화 전통을 부흥시키고 변화한 사회풍조에 알맞은 민족미술을 발전시키며 후진양성 및 미술연구의 목적으로 탄생되었고, 고희동, 안중식, 조석진, 정학수, 김응원, 강필주, 나수연, 김규진, 이도영, 등이 가담했다. 이들중에 고희동 한 사람만이 동경에서 새로운 미술교육을 받았던 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두 구시대의 사고 방식에 젖어있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구성원속에서 새로운 비전이 제시될리 만무했다. 심전이나 소림에게서 그림을 배운 사람들은 모두가 옛화보를 보고 충실히 익히라는 교육만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화협회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민간주도의 집단 미술운동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와 음직임으로 볼수있으며, 또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던 조국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최초의 미술단체였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안중식과 조석진 이후 한국 근대화단은 김은호와 박승무, 이상법, 변관식, 노수현, 허백련, 이용우 등의 화가들과 외국에서 유화를 배우고 돌아온 고희동, 나혜석, 김관호, 이종우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허백련을 제외하고 동양화법으로 그림을 그린 다른 화가들은 모두 서화협회보다 앞서 만들어진 서화미술회강습소에서 심전과 소림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화보를 보고 그대로 모사하는 식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 이었으니 그속에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중에서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은 새로운 개성적 양식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드문작가들이었다.

근대미술사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던 서화협회는 운영난과 일제의 탄압에의해 1936년 15회전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5. 조선미술전람회

1919년 3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식민통치의 거점인 조선총독부는 유화제스처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여러 가지 제도개선책을 제시했는데 그중 미술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제도의 도입이 자국의 관전형식을 본뜬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이었다. 조선미전의 창설에는 이른바 조선미전이 창설되기 전에 조선의 서화가들이 '서화협회'를 조직하자 이들의 움직임을 분산, 약화시키기 위한 책략도 깔려 있었다.

또한 조선미전은 대부분의 심사위원이 일본인들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품작가의 반 이상이 일본작가들이었기 때문에 일본미술에의 종속을 심화시키는 현상을 낳았다.

나아가 관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아카데미즘의 답습을 통한 식민지 작가들의 개인적 입신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23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전이 일본미술의 아류를 생산하는 관제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모전의 조직방식에 따라 우리 나라 미술계는 동양화․양화․조각․서예․공예 등으로 장르별 경계가 정해졌다. 그러나 조선미전과 별도로 1920년대 이후로 작가들의 자발적인 필요와 요구에 따라 많은 미술단체와 교습소 등이 나타나 미술의 층위를 두텁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본뿐 아니라 이종우, 장발, 임용련, 백남순, 배운성 등 서구로 유학한 작가도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조각분야에서는 김복진의 뒤를 이어 김종영, 윤승욱, 윤효중, 김경승, 이국전 등이 일본으로 유학, 서구적 조각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활동하였다.

 

6. 그밖의 미술단체

전통화단의 신흥세인 김은호의 문도들에의해 1936년 후소회가 탄생하였다. 김은호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성장하여 조선미술전과 서화협회전에서 주목을 꿀었던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한유동, 장운봉, 조중현, 이유태 등의 20대 젊은 작가들이 정기적 동문전 개최라는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1943년까지 6회의 정기전을 갖었던 후소회의 회원들은 남화적인것에서 북화적인것, 일본화적인것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발표하며 광복이후 우리의 자주적 전통화단을 새로운 상황으로 창성하는 주역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이처럼 김은호는 1930, 1940년대를 걸쳐 신진 미술세를 가장 많이 길러내었다. 물론 김은호 만큼은 활발하지 않았으나, 청전 이상범역시 그의 예술적 특질인 야취짙은 수묵풍경화의 계보를 형성하는 문하생을 길러내었다. 1930년대 초부터 조선미술전 관문을 통과하고, 서화협회전에도 신진으로 참여한 배염, 심은택, 이현옥, 정용회, 박원수, 이건영등의 그의 문도들이였다. 이들은 청전화숙전을 개최하여 1943년 후소회전과 함께 신진 양대세로 남게되었다. 또한 전통적 남종화의 법통을 엄격히 지키면서 고전적 정신주의를 추구하는 호남의 대표화가 허백련 역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문인화가와 산수화가를 배출하였다. 구철우, 이범재, 허행면, 성재휴, 김옥진 등은 연진회라는 이름으로 광주에서 여러번 회원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7. 맺는 말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주체적으로 한국미의 정체성에 대해 규정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타의적이고 비하의 의도로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반동으로서 근현대 한국화단에는 한국화의 정체성과 당위성을 모색해 한국화를 정립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화협회를 비롯한 근대의 미술단체 및 미술가들은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서화협회가 어떠한 한국적 화풍을 표방하지 않은점도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심지어 현재까지 한국화, 혹 동양화라 불리는 우리미술의 이름조차 그 정체성을 갖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다. 흔히 우리나라의 회화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미술조류에 발맞추면서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독창적 회화의 세계를 펴쳐온 것으로 언급되지만, 전통회화의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된다. 또한 현대의 한국미술 역시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속에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된다. 그리고 그 혼란의 분기가 근대의 일제시대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다음의 역할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